이미지들2007. 9. 14.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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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잘 오지 않는 북경에서, 비가 내리는 것은 즐거워야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썩 즐거운 일은 아니다. 나이가 먹어서 일까.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니다.
비가 오면, 나의 삶만큼 다른 이들의 삶도 참으로 고단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foto by 2007. 9. 13 en Pe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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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2007. 9. 14. 00:16
            
       Luis Bunuel


 

"스크린의 흰 막은 빛을 반사시킬 수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우주가 폭발할 것이다."
                                                                                                                    - 루이스 브뉘엘



“스페인 최고의 감독은 누구인가?” 묻는다면, 필자는 서슴없이 루이스 부뉘엘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세계 영화사적으로나 스페인 영화사적으로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그의 영화는 실로 충격 그 자체이다. 솔직히 말로 그의 영화를 설명해서는 그 충격을 쉽게 이해할 수는 없다. 필자가 그의 영화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작년에 열린 <스페인 영화 페스티발>에서 였다. 그곳에서 <안달루시아의 개>라는 영화를 처음 보게 되었다. 1929년에 만들어진 이 작품에 흥미도 느끼지 못했지만, 가장 충격적인 장면으로 입에 오르내리는 이 영화의 도입부를 보기 위해 이 영화를 보았다. 만들어진 70년이나 지난 영화이니 충격 이래봐야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보고 난 후 영화가 준 충격은 실로 엄청나다. 한 여자의 눈이 클로즈업되고 관객을 빤히 쳐다본다. 그리고 하나의 면도칼이 다가와 그녀의 눈을 잘라낸다. 어떠한 색채와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진행된다.

 

<안달루시아의 개>의 도입부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영화가 보여주는 과감한 표현방식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현대의 어떤 영화 중에서도 그보다 충격적인 장면을 보지 못했다. 이 영화의 도입부는 충격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관객의 시선을 파괴해버리기 때문이다. 영화는 관객의 시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관객의 시선을 외면한 영화는 소통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도입부는 관객의 시선을 파괴해 버린다. 관객들은 이미 그들의 만들어진 시선으로 영화를 바라보며, 보는 즐거움에 의해 영화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 비쳐진 세계 이면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러한 것을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아니면 관객이 영화를 바라보는데 능동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루이스 부뉘엘은 전자의 방법을 택함으로써, 현실 너머의 현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충격으로 점철되면서도,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은 그의 영화를 바라보면서 깨져 나가면서도, 말하고자 하는 실재를 알 수가 없다. 총 12컷으로 만들어진 <안달루시아의 개>가 무엇을 얘기하는 것인지 도대체 알 길이 없다. 제목만 봐도 그렇다. 안달루시아 지방은 스페인 남부 지방으로 이슬람 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지역이다. 집시들의 문화 또한 스며들어간 지역이기도 하다. 안달루시아의 개라는 제목이 이 영화에 갖는 의미를 도저히 알 길이 없다. 일종의 상징이라 생각하고 영화를 좋아하는 스페인 친구 몇몇에게 물어 봤지만, 그들도 알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파헤쳐 들어가다 보면 더욱 복잡해질 뿐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설명할 것이 없는 단순한 이치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루이스 부뉘엘 영화의 매력이다. 마치 보르헤스의 소설과도 같다. 미로를 따라가다 보면 공허한 원형에 도달하게 된다. 그 원형은 닫힌 구조가 아니다.  그의 영화는 우연과 충격으로 관객에게 얘기하면서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그것이 바로 현실을 눈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영화에서 보여 지는 결말도 마찬가지다. 어떠한 종국에 이르러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수한 선택의 가능성을 만들어 놓는다. 이것이 결말인가 하는 사이에 영화는 끝나버린다. 한 번쯤 그의 영화를 통해, 무수한 가능성의 세계를 걸어 보길 권한다.



유쾌한씨, 1105호 단대신문 칼럼.


Posted by pekin
영화2007. 9. 14. 00:13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정리 중 입니다. 옛날 생각이 나곤 하네요. ^^

떼시스 (Tesis, 1996 알렉한드로 아메나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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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천재나 거장으로 부르기는 이르지만, 스페인 영화계에 구세주로 떠오르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알렉한드로 아메나바르 이다. 그는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젊기에 스페인 영화의 부흥기를 이끌어 줄 것이라는 기대가 괜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 사람이 누군데 할지도 모르니, <디 아더스>의 감독이라고 얘기하자. 그의 데뷔작은 1996년에 나온 <떼시스>이다. 데뷔작이지만 유쾌한씨가 그 영화를 본 것은 얼마 전이다. 굳이 보려고 해서 본 것도 아니고, TV에서 해줘서 봤다. 이렇게 쓰고 생각해보니 유쾌한씨는 그의 영화를 제작년도 역순으로 봤다. 아직 만든 영화가 3편 밖에 되지 않으니 다 찾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디 아더스> <아브레 로스 오호스(Abre los ojos 스페인어로 눈을 떠라.는 뜻임=오픈 유어 아이즈)> <떼시스> 순으로 봤다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유쾌한씨에게는 <떼시스>가 가장 괜찮은 영화였다는 사실이다.

 

 대박과 호평을 거머쥔 <디 아더스>나 <아브레 로스 오호스>보다 7년 전의 <떼시스>가 더 괜찮다니... 쩝. 우선 그의 영화 세편의 공통점을 이야기 하자면 모두 관객을 속이는 스릴러 영화이다. 물론 <디 아더스>는 스릴러라기 보다는 호러적 성격이 강하지만, 결국 관객을 속이고자 한 것은 매 한가지다. 그는 관객을 속이는데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만드는데 정교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또 한가지의 특징은 등장인물의 수가 적다는 것이다. 저예산 영화에 관심이 많아서 인지, 아니면 너저분하게 널부러지면 집중력이 떨어져서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등장인물의 수가 적다. 거기에 <떼시스>와 <아브레 로스 오호스>의 주인공들은 똑같기까지 하다. (두 영화를 가지고 등장인물을 비교하는 것도 심심치 않은 재미임.) 각설하고, 이 세 편의 공통점을 지니면서 다른 점이니 있으니 어느 위치에다 포인트를 두는가 이다. <떼시스>의 경우는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 속에서, <아브레 로스 오호스>는 환상과 현실이라는 공간 속에서, <디 아더스>는 대저택이라는 폐쇄된 공간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속이는 것은 매 한가지 일지라도, 스토리가 가장 풍족해질 수 있는 것은 <떼시스>인 것이다. 그러기에 스토리를 가지고 놀기 좋아하는 유쾌한씨에게는 <떼시스>가 가장 좋다.

 <떼시스>의 핵심은 아주 간단하다. 매스미디어의 폭력물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떼시스(논제)를 가지고 논문을 쓰는 앙헬라 라는 여학생이 있다. 논문을 쓰기 위해 자료 수집과 조사는 당연한 일. 폭력물을 구해서 보게 되고, 그런 도중 스너프 필름을 접하게 되는데 그 필름을 제작한 범인을 찾게 되면서 이야기가 엉켜져 들어간다. 결국 누가 범인인가?를 찾는 게임이다. 결말부에 범인이 누군가 밝혀지지만, 관객들은 영화와 감독과 한판 씨름을 해야 한다. 범인을 잡기 위해. 특히 이 과정을 교차편집과 폐쇄적 환경들(미로, 어둠 등등)을 이용하면서 긴장감을 팽팽히 유지한다. 하지만 이건 스릴러 영화의 너무 뻔한 것들이니 <떼시스>가 왜 괜찮은지는 봐야지 알 수 있다.

 

 그보다도 감독은 영화 속에서 많은 얘기들을 하고 싶어한다. 물론 직접 대놓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 공부 직후인데다, 데뷔작이라는 그런 것도 있겠지만, 폭력물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을 던진다. 앙헬라의 테시스처럼 폭력물은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앙헬라의 전임 교수였던 피게로아 교수가 죽고, 그녀의 담당 교수가 된 카스트로는(제대로 기억이 안남) 영화는 대중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영화는 결국 산업이라면서 말이지. 이러한 이유로 자신의 스너프 필름들을 정당화하고자 하고. 앙헬라와 카스트로 교수의 주제는 전혀 상반된다고 할 수 있다. 폭력적인 것들을 다룬 매스미디어는 관객이 원해서 만들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수없이 만들어지는 폭력적인 매스미디어들에 의해 관객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 영화의 결말을 보면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지만, 무엇인지 정답인지 말하지 않겠다. 그건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질문인과 동시에, 이분법적으로 낼 수 없는 답이 아니니까.

 

떼시스의 결말 : 스너프 필름 제작의 주범을 찾아내지만, 영원히 은폐되어야 할 필름들은 알 권리라는 이름아래 TV 뉴스를 통해 방송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장면들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하지만 체마와 앙헬라는 보지 않고 그 사람들 틈을 빠져 나온다. (마치 그곳이 함정인 것처럼 유쾌한씨의 생각임.)

 

 이 글을 다 쓰고 문득 들은 생각인데, 알렉한드로 아메나바르 자기 인생의 영화 3편을 모두 20대에 만들었다. 20대에 성공하려면 그와 같아야 한다. 그런데 유쾌한씨는 어디 서있는지. 쿨럭.




2004. 2. 1. Lu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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