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2007. 9. 21. 10:07

예전에 썼던 글 정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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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세 루이스 꾸에르다의 <마리포사 : La lengua de las mariposas> 영화를 알게 된 것은 마누엘 리바스의 영화를 통해서 이다. 마누엘 리바스는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영화는 1시간 30분 동안 이야기를 보여주지만, 그는 불과 20 페이지도 안 되는 종이 속에 이야기를 풀어냈다. 영화는 그의 이야기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잔잔하게 스페인 내전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영화는 스페인 내전의 단편을 다루고 있지만, 극단적이지도 참혹하지 않다. 한 아이의 눈을 통해 그 시대를 보여 줄 뿐이다. 1936년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의 작은 마을, 천식을 앓으며 호기심 많은 몬초라는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몬초는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매일같이 때린다는 형의 말에,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훌륭한 선생님인 그레고리 선생님을 통해 세상을 알아가게 된다. 자연의 소중함을 배우고 정의를 배우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 1936년을 전후한 스페인은 이 훌륭한 선생님을 외면했다. 1936년 프랑코가 내전을 일으키기 까지, 스페인은 왕정, 군사독재, 공화정 등을 급속하게 반복하였다. 이 속에서 사람들이 설 땅은 어디인가. 사람들은 어디에 몸을 기대어야 하는가. 특히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 자신의 신조가 굳은 사람들 그들은 어떻게 처신할 수 있는 것인가. 공화주의 지지자인 그레고리 선생님의 모습은 이 속에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물론 영화는 이러한 모습을 강렬하게 보여주진 않는다. 단지 몬초라는 아이를 통해 비쳐줄 뿐이다. 아직 사고가 정립되지 않은, 호기심 많고 순수한 한 어린 아이를 통해 보여줄 뿐이다.
 
 영화는 잔잔하게 보여주지만 영화를 본 후 강렬한 인상이 남는 것은 마지막 장면 때문이다. 내전 속에서 그레고리 선생님은 공화주의자라는 이유로 끌려가게 된다. 물론 몬쵸 아버지도 공화주의자였지만, 내전이후 발 빠른 대처로 위기를 벗어난다. 공화주의자들이 트럭에 실려 끌려가는 마지막 장면, 그들과 친하게 지냈던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욕설을 퍼붓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떠나가는 트럭을 향해 돌을 던진다. 이때 몬쵸도 어머니에게 떠밀려 돌을 던지려고 뛰어가는 장면, 돌을 던지기 직전의 순간, 이 장면이 이 영화의 마지막이다. 이념이 무엇인지 모르는 한 소년이 존경하는 선생님에게 돌을 던지려는 아이, 그는 무엇에 돌을 던지는 것일까.

 이 영화는 감동과 함께 이념이란 무엇인가, 자유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다루기 어려운 이야기를 아이를 통해 잘 풀어내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당연히 역사적이고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문제를 아이를 통해 관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스페인 내전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단순히 감동만을 선사한다면 문제가 있다. 우리의 역사가 그렇듯, 스페인의 내전도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2004. 9.
Posted by pekin
영화2007. 9. 18. 15:10

예전에 썼던 글 정리중...


Hable con ella


얼마 전 스페인에서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신작 <나쁜 교육(La Mala Educación)>이 개봉했다. 한국에서 그의 영화를 접할 때는, 그의 영화가 지닌 대중성을 의심했다. 그의 영화는 초반에 관객의 흥미를 이끌어 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해하기 힘든 세계로 빠져든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야기하는 방식은 전형적인 서사구조를 띄지 않는다. 스페인에서 그가 상당한 흥행감독이라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그것이 사실인가에 대해서는 상당히 의심을 했다. 하지만 필자가 그의 신작을 접하면서 이러한 의심은 사라졌다. 곳곳에 붙은 그의 영화 포스터와 상영관을 채운 관객들은 그의 인기를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상당수의 영화를 찍었지만 한국에서 접해볼 수 있는 영화는 몇 편 되지 않는다. 프랑코 독재 정권이 끝나면서 찍은 그의 영화들은 그동안 표현할 수 없었던 욕망의 분출, 그 자체였다. 90년대 중반 이후 찍은 그의 영화에서는 강렬한 욕망은 느낄 수 없다. 물론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 <그녀에게(2002)>, <나쁜 교육(2004)>은 하나같이 걸작들이다. 하지만 알모도바르는 이제 조용히 말할 수 있는 법을 알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쉽게 구해 볼 수 있는 그의 영화는 <내 어머니의 모든 것>과 <그녀에게>일 것이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 깐느를 휩쓴 것은 괜한 허풍이 아니다. 그 영화는 그의 영화 중 가장 잘 다듬어진 영화이며 그의 작품세계를 느낄 수 있는 가장 좋은 영화다. 하지만 필자는 그의 영화를 처음 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그녀에게>를 권한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상당히 난해한 면을 지니기 때문이다. 반면 <그녀에게> 한국에서도 상당수 매니아를 지니고 있을 만큼, 어느 정도 이해의 범위 안에 존재한다. 이해의 범위라는 것이 곧 관객의 수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스페인에서 스페인 영화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이해하기 힘든 문화의 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사랑의 소통에 관한 영화이다. 남자 간호사 베니그니는 발레리나 알리샤를 사랑한다. 하지만 소심한 베니그니는 알리샤에게 말을 걸지 못한다. 그저 그의 내면 속에 사랑을 숨기고 바라 볼 뿐이다. 하지만 알리샤가 코마 상태에 빠지고, 그가 일하는 병원에 입원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그의 모든 것을 알리샤에게 보낸다. 이것은 일반적이지 못한, 일방향 소통이다. 이번엔 영화 속의 다른 축 마르코를 보자. 기자인 마르코는 TV를 통해 투우사 리디아를 우연히 접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는 기사를 통해, 그녀와 얘기하게 된다. 이미 리디아는 사랑의 아픔을 지니고 있고, 투우 경기 중 죽음에 이르는 길을 택한다. 하지만 리디아도 죽음에 이르기 보다는 알리샤처럼 코마에 빠진다. 이때 마르코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눈물을 흘리는 일 뿐이다. 영화 속에서 마르코의 눈물은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일방향으로 보낼 수밖에 없는 슬픔이다. 이 슬픔은 베니그니와 마르코의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극대화된다. 하지만, 똑같은 슬픔을 지닌 둘의 만남은 쌍방향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 공간을 바라볼 수 있는 순간 격한 슬픔이 밀려온다. <그녀에게>는 바로 그 슬픔에 관한 영화인 것이다. 이 영화를 보게 된다면, 알리샤의 발레 선생님을 유심히 보기 권한다. 그녀가 바로 찰리 채플린의 딸인데, 영화를 보는 또 하나의 재미일 것이다.

Posted by pekin
영화2007. 9. 18. 15:01

예전에 썼던 글 정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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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나 중남미의 영화감독 얘기를 하는 것은 지루한 면이 있다. 손에 꼽는 몇몇 거장들을 제외하고는 작품을 접하기 거의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 수입사에 의해 선택되는 몇몇 작품만을 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스페인 영화를 접할 때는 감독을 살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최근 한국에 수입된 <엄마는 여자를 좋아해>라는 작품도 호평을 받고 있으면서도, 감독의 얘기가 별로 거론되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 중에 하나다. 이번 호에서 얘기할 <꿈 속의 여인>도 예외는 아닐 것 같다. 이 영화의 감독에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아름다운 시절>로 첸 카이거의 <패왕별희>를 제치고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던 감독이다. <꿈 속의 여인>은 한국에 수입되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스페인 개봉당시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스페인에는 작고 큰 영화제뿐만 아니라, 자국영화에 수여하는 고야라는 영화상이 있는데, 스페인에서는 미국의 아카데미와 같은 권위를 지닌다. 이 영화는 작품상을 비롯해 7개 부분에서 고야상을 수상했었다. 수상 여부가 영화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꿈 속의 여인>은 흥행뿐만 아니라 비평에서도 성공을 거둔 작품인 것이다.

 

<꿈 속의 여인> 1938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시기는 스페인 내전이 끝나고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의 상황이다. 이 때 스페인 영화제작진과 배우 마까레나가 <꿈 속의 여인>이란 독일과 스페인 합작영화에 촬영하기 위해 독일 우파(UFA) 스튜디어를 찾으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우파 스튜디어는 히틀러의 최측근이자 나치정권의 문화선전 부분을 담당하고 있던 괴델스에 의해 지휘되고 있었다. 그런데 권력의 핵심, 괴델스가 마까레나를 좋아하게 되면서부터 생기는 에피소드를 영화는 다루고 있다. 꽤나 무거운 내용을 다루고 있는 듯하지만, 페르난도 트루에바는 <아름다운 시절>에서 그랬던 것처럼 멜로와 코미디를 빌려 가볍게 다가간다. 특히나 영화의 결말은 전형적인 멜로 드라마의 형식을 취한다. 집시 죄수인 레오라는 청년은 마까레나가 출연하는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해, 마까레나를 사랑하게 된다. 영화의 결말은 마까레나가 권력과 부가 아닌 레오를 선택하면서 끝난다. 이러한 결말은 정치적 문제, 역사적 문제 속에서 자신의 영화를 살짝 비켜 세운 감독의 의도를 나타낸다.

 

솔직히 이 영화가 재미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얘기하기는 힘들 것 같다. 페넬로페 크루즈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영화의 재미를 느끼기는 어렵다. 우선 영화가 다루고 있는 역사적 배경도 그렇지만, 영화가 다루고 있는 코미디의 핵심을 즐기기가 어렵다. 영화는 독일과 스페인이 합작영화를 만들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다루다 보니 통역과정에서 생기는 재미들이 있다. 스페인어와 독일어를 모르는 관객들이 자막으로만 그런 재미를 느끼기는 힘들다.


2004.
Posted by pekin
영화2007. 9. 14. 00:16
            
       Luis Bunuel


 

"스크린의 흰 막은 빛을 반사시킬 수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우주가 폭발할 것이다."
                                                                                                                    - 루이스 브뉘엘



“스페인 최고의 감독은 누구인가?” 묻는다면, 필자는 서슴없이 루이스 부뉘엘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세계 영화사적으로나 스페인 영화사적으로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그의 영화는 실로 충격 그 자체이다. 솔직히 말로 그의 영화를 설명해서는 그 충격을 쉽게 이해할 수는 없다. 필자가 그의 영화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작년에 열린 <스페인 영화 페스티발>에서 였다. 그곳에서 <안달루시아의 개>라는 영화를 처음 보게 되었다. 1929년에 만들어진 이 작품에 흥미도 느끼지 못했지만, 가장 충격적인 장면으로 입에 오르내리는 이 영화의 도입부를 보기 위해 이 영화를 보았다. 만들어진 70년이나 지난 영화이니 충격 이래봐야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보고 난 후 영화가 준 충격은 실로 엄청나다. 한 여자의 눈이 클로즈업되고 관객을 빤히 쳐다본다. 그리고 하나의 면도칼이 다가와 그녀의 눈을 잘라낸다. 어떠한 색채와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진행된다.

 

<안달루시아의 개>의 도입부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영화가 보여주는 과감한 표현방식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현대의 어떤 영화 중에서도 그보다 충격적인 장면을 보지 못했다. 이 영화의 도입부는 충격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관객의 시선을 파괴해버리기 때문이다. 영화는 관객의 시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관객의 시선을 외면한 영화는 소통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도입부는 관객의 시선을 파괴해 버린다. 관객들은 이미 그들의 만들어진 시선으로 영화를 바라보며, 보는 즐거움에 의해 영화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 비쳐진 세계 이면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러한 것을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아니면 관객이 영화를 바라보는데 능동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루이스 부뉘엘은 전자의 방법을 택함으로써, 현실 너머의 현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충격으로 점철되면서도,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은 그의 영화를 바라보면서 깨져 나가면서도, 말하고자 하는 실재를 알 수가 없다. 총 12컷으로 만들어진 <안달루시아의 개>가 무엇을 얘기하는 것인지 도대체 알 길이 없다. 제목만 봐도 그렇다. 안달루시아 지방은 스페인 남부 지방으로 이슬람 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지역이다. 집시들의 문화 또한 스며들어간 지역이기도 하다. 안달루시아의 개라는 제목이 이 영화에 갖는 의미를 도저히 알 길이 없다. 일종의 상징이라 생각하고 영화를 좋아하는 스페인 친구 몇몇에게 물어 봤지만, 그들도 알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파헤쳐 들어가다 보면 더욱 복잡해질 뿐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설명할 것이 없는 단순한 이치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루이스 부뉘엘 영화의 매력이다. 마치 보르헤스의 소설과도 같다. 미로를 따라가다 보면 공허한 원형에 도달하게 된다. 그 원형은 닫힌 구조가 아니다.  그의 영화는 우연과 충격으로 관객에게 얘기하면서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그것이 바로 현실을 눈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영화에서 보여 지는 결말도 마찬가지다. 어떠한 종국에 이르러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수한 선택의 가능성을 만들어 놓는다. 이것이 결말인가 하는 사이에 영화는 끝나버린다. 한 번쯤 그의 영화를 통해, 무수한 가능성의 세계를 걸어 보길 권한다.



유쾌한씨, 1105호 단대신문 칼럼.


Posted by pekin
영화2007. 9. 14. 00:13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정리 중 입니다. 옛날 생각이 나곤 하네요. ^^

떼시스 (Tesis, 1996 알렉한드로 아메나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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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천재나 거장으로 부르기는 이르지만, 스페인 영화계에 구세주로 떠오르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알렉한드로 아메나바르 이다. 그는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젊기에 스페인 영화의 부흥기를 이끌어 줄 것이라는 기대가 괜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 사람이 누군데 할지도 모르니, <디 아더스>의 감독이라고 얘기하자. 그의 데뷔작은 1996년에 나온 <떼시스>이다. 데뷔작이지만 유쾌한씨가 그 영화를 본 것은 얼마 전이다. 굳이 보려고 해서 본 것도 아니고, TV에서 해줘서 봤다. 이렇게 쓰고 생각해보니 유쾌한씨는 그의 영화를 제작년도 역순으로 봤다. 아직 만든 영화가 3편 밖에 되지 않으니 다 찾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디 아더스> <아브레 로스 오호스(Abre los ojos 스페인어로 눈을 떠라.는 뜻임=오픈 유어 아이즈)> <떼시스> 순으로 봤다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유쾌한씨에게는 <떼시스>가 가장 괜찮은 영화였다는 사실이다.

 

 대박과 호평을 거머쥔 <디 아더스>나 <아브레 로스 오호스>보다 7년 전의 <떼시스>가 더 괜찮다니... 쩝. 우선 그의 영화 세편의 공통점을 이야기 하자면 모두 관객을 속이는 스릴러 영화이다. 물론 <디 아더스>는 스릴러라기 보다는 호러적 성격이 강하지만, 결국 관객을 속이고자 한 것은 매 한가지다. 그는 관객을 속이는데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만드는데 정교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또 한가지의 특징은 등장인물의 수가 적다는 것이다. 저예산 영화에 관심이 많아서 인지, 아니면 너저분하게 널부러지면 집중력이 떨어져서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등장인물의 수가 적다. 거기에 <떼시스>와 <아브레 로스 오호스>의 주인공들은 똑같기까지 하다. (두 영화를 가지고 등장인물을 비교하는 것도 심심치 않은 재미임.) 각설하고, 이 세 편의 공통점을 지니면서 다른 점이니 있으니 어느 위치에다 포인트를 두는가 이다. <떼시스>의 경우는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 속에서, <아브레 로스 오호스>는 환상과 현실이라는 공간 속에서, <디 아더스>는 대저택이라는 폐쇄된 공간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속이는 것은 매 한가지 일지라도, 스토리가 가장 풍족해질 수 있는 것은 <떼시스>인 것이다. 그러기에 스토리를 가지고 놀기 좋아하는 유쾌한씨에게는 <떼시스>가 가장 좋다.

 <떼시스>의 핵심은 아주 간단하다. 매스미디어의 폭력물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떼시스(논제)를 가지고 논문을 쓰는 앙헬라 라는 여학생이 있다. 논문을 쓰기 위해 자료 수집과 조사는 당연한 일. 폭력물을 구해서 보게 되고, 그런 도중 스너프 필름을 접하게 되는데 그 필름을 제작한 범인을 찾게 되면서 이야기가 엉켜져 들어간다. 결국 누가 범인인가?를 찾는 게임이다. 결말부에 범인이 누군가 밝혀지지만, 관객들은 영화와 감독과 한판 씨름을 해야 한다. 범인을 잡기 위해. 특히 이 과정을 교차편집과 폐쇄적 환경들(미로, 어둠 등등)을 이용하면서 긴장감을 팽팽히 유지한다. 하지만 이건 스릴러 영화의 너무 뻔한 것들이니 <떼시스>가 왜 괜찮은지는 봐야지 알 수 있다.

 

 그보다도 감독은 영화 속에서 많은 얘기들을 하고 싶어한다. 물론 직접 대놓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 공부 직후인데다, 데뷔작이라는 그런 것도 있겠지만, 폭력물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을 던진다. 앙헬라의 테시스처럼 폭력물은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앙헬라의 전임 교수였던 피게로아 교수가 죽고, 그녀의 담당 교수가 된 카스트로는(제대로 기억이 안남) 영화는 대중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영화는 결국 산업이라면서 말이지. 이러한 이유로 자신의 스너프 필름들을 정당화하고자 하고. 앙헬라와 카스트로 교수의 주제는 전혀 상반된다고 할 수 있다. 폭력적인 것들을 다룬 매스미디어는 관객이 원해서 만들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수없이 만들어지는 폭력적인 매스미디어들에 의해 관객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 영화의 결말을 보면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지만, 무엇인지 정답인지 말하지 않겠다. 그건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질문인과 동시에, 이분법적으로 낼 수 없는 답이 아니니까.

 

떼시스의 결말 : 스너프 필름 제작의 주범을 찾아내지만, 영원히 은폐되어야 할 필름들은 알 권리라는 이름아래 TV 뉴스를 통해 방송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장면들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하지만 체마와 앙헬라는 보지 않고 그 사람들 틈을 빠져 나온다. (마치 그곳이 함정인 것처럼 유쾌한씨의 생각임.)

 

 이 글을 다 쓰고 문득 들은 생각인데, 알렉한드로 아메나바르 자기 인생의 영화 3편을 모두 20대에 만들었다. 20대에 성공하려면 그와 같아야 한다. 그런데 유쾌한씨는 어디 서있는지. 쿨럭.




2004. 2. 1. Luis

Posted by pe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