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2007. 9. 18. 15:19

예전에 썼던 글 정리중. ..


Como Agua Para Chocolate



알폰소
아라우 감독의 <달콤 쌉싸름한 쵸코렛(Como Agua Para Chocolate)>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감독도, 영화도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이들 중 대부분은 이 영화를 좋아한다. 필자가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2년 전 <현대 중남미 소설의 이해>라는 수업에서였다. 60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이 수업을 들었는데, <달콤 쌉싸름한 쵸코렛>을 볼 때 졸거나 딴 짓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모두들 재미있게 영! 화를 봤다. 이 영화는 기존의 멜로 드라마의 구조를 그대로 가지지만, 복잡한 스토리 라인과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를 이해하는데 상당히 어려움이 많음에도 대부분의 학생들이 재미있게 관람하였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것은 그들이 기존의 구태의연한 영화에 식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1895년 한 집안의 막내딸인 띠따의 출생으로부터 시작하여 대략 20년 동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의 중심은 띠따와 베드로의 슬픈 사랑이야기다. 띠따는 베드로는 서로 사랑하지만, 띠따의 어머니는 막내딸은 결혼하지 않고 어머니를 보살펴야 한다는 전통에 따라 그녀의 결혼을 반대한다. 결국 베드로는 띠따의 언니와 결혼하게 된다. 이 기본 구조 속에서 복잡한 이야기들이 얽혀들게 된다. 뿐만 아니라 멕시코의 혁명과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신파극 같은 뻔한 사랑이야기를 기존의 멜로 구조 속에서 진행시키면서, 그것을! 해체시키는데 있다. 구태의연한 내러티브 구조로 영화는 진행되지만, 그것을 이끌어가는 장면들은 구태의연하지 않다. 한 예로, 띠따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띠따의 어머니는 산파도 없이 부엌에서 식모인 나챠의 도움으로 띠따를 낳는다. 이 과정에서 띠따의 어머니는 엄청난 양수를 쏟아낸다. 영화에서는 세상으로 밀려난 눈물의 물결을 타고 띠따가 나왔다고 얘기한다. 출산이 끝난 후 나챠는 눈물의 흔적을 치우는데, 소금을 쓸어 담는 일이다. 한동안 나챠 는 이 소금을 음식 만들 때 사용한다. 띠따의 어머니가 쏟아낸 양수는 곧 눈물이고, 눈물이 마른 흔적은 소금이다. 그리고 소금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만들 때 사용된다. 이 장면은 단순하지 않다. 멜로 드라마들은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지기 전에, 주인공들의 상황과 이미! 지를 만드는 작업을 한다. <달콤 쌉싸름한 쵸코렛>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띠따가 만드는 이야기는 굉장히 다르다.

 

 <달콤 쌉싸름한 쵸코렛>을 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띠따의 출생이 그렇듯, 환상성과 우연성으로 가득 차 있다.  문제는 관객이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근대적 사고, 현대적 사고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은, 환상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중남미인들에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의 결말부에는 소설에 가족의 비극을 상징하는 꼬리달린 아? 隔?태어난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마르케스는 이 소설이 출간된 이후 중남미의 많은 독자들로부터, 꼬리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고백의 편지를 여러 통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현실일까. 탈신화적 존재인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중남미인들에겐 실재였던 것이다. 이 사실이 바로 이 영화를 이해하는 시작이다.

Posted by pekin
영화2007. 9. 18. 15:10

예전에 썼던 글 정리중...


Hable con ella


얼마 전 스페인에서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신작 <나쁜 교육(La Mala Educación)>이 개봉했다. 한국에서 그의 영화를 접할 때는, 그의 영화가 지닌 대중성을 의심했다. 그의 영화는 초반에 관객의 흥미를 이끌어 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해하기 힘든 세계로 빠져든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야기하는 방식은 전형적인 서사구조를 띄지 않는다. 스페인에서 그가 상당한 흥행감독이라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그것이 사실인가에 대해서는 상당히 의심을 했다. 하지만 필자가 그의 신작을 접하면서 이러한 의심은 사라졌다. 곳곳에 붙은 그의 영화 포스터와 상영관을 채운 관객들은 그의 인기를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상당수의 영화를 찍었지만 한국에서 접해볼 수 있는 영화는 몇 편 되지 않는다. 프랑코 독재 정권이 끝나면서 찍은 그의 영화들은 그동안 표현할 수 없었던 욕망의 분출, 그 자체였다. 90년대 중반 이후 찍은 그의 영화에서는 강렬한 욕망은 느낄 수 없다. 물론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 <그녀에게(2002)>, <나쁜 교육(2004)>은 하나같이 걸작들이다. 하지만 알모도바르는 이제 조용히 말할 수 있는 법을 알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쉽게 구해 볼 수 있는 그의 영화는 <내 어머니의 모든 것>과 <그녀에게>일 것이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 깐느를 휩쓴 것은 괜한 허풍이 아니다. 그 영화는 그의 영화 중 가장 잘 다듬어진 영화이며 그의 작품세계를 느낄 수 있는 가장 좋은 영화다. 하지만 필자는 그의 영화를 처음 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그녀에게>를 권한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상당히 난해한 면을 지니기 때문이다. 반면 <그녀에게> 한국에서도 상당수 매니아를 지니고 있을 만큼, 어느 정도 이해의 범위 안에 존재한다. 이해의 범위라는 것이 곧 관객의 수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스페인에서 스페인 영화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이해하기 힘든 문화의 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사랑의 소통에 관한 영화이다. 남자 간호사 베니그니는 발레리나 알리샤를 사랑한다. 하지만 소심한 베니그니는 알리샤에게 말을 걸지 못한다. 그저 그의 내면 속에 사랑을 숨기고 바라 볼 뿐이다. 하지만 알리샤가 코마 상태에 빠지고, 그가 일하는 병원에 입원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그의 모든 것을 알리샤에게 보낸다. 이것은 일반적이지 못한, 일방향 소통이다. 이번엔 영화 속의 다른 축 마르코를 보자. 기자인 마르코는 TV를 통해 투우사 리디아를 우연히 접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는 기사를 통해, 그녀와 얘기하게 된다. 이미 리디아는 사랑의 아픔을 지니고 있고, 투우 경기 중 죽음에 이르는 길을 택한다. 하지만 리디아도 죽음에 이르기 보다는 알리샤처럼 코마에 빠진다. 이때 마르코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눈물을 흘리는 일 뿐이다. 영화 속에서 마르코의 눈물은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일방향으로 보낼 수밖에 없는 슬픔이다. 이 슬픔은 베니그니와 마르코의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극대화된다. 하지만, 똑같은 슬픔을 지닌 둘의 만남은 쌍방향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 공간을 바라볼 수 있는 순간 격한 슬픔이 밀려온다. <그녀에게>는 바로 그 슬픔에 관한 영화인 것이다. 이 영화를 보게 된다면, 알리샤의 발레 선생님을 유심히 보기 권한다. 그녀가 바로 찰리 채플린의 딸인데, 영화를 보는 또 하나의 재미일 것이다.

Posted by pekin
영화2007. 9. 18. 15:01

예전에 썼던 글 정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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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나 중남미의 영화감독 얘기를 하는 것은 지루한 면이 있다. 손에 꼽는 몇몇 거장들을 제외하고는 작품을 접하기 거의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 수입사에 의해 선택되는 몇몇 작품만을 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스페인 영화를 접할 때는 감독을 살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최근 한국에 수입된 <엄마는 여자를 좋아해>라는 작품도 호평을 받고 있으면서도, 감독의 얘기가 별로 거론되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 중에 하나다. 이번 호에서 얘기할 <꿈 속의 여인>도 예외는 아닐 것 같다. 이 영화의 감독에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아름다운 시절>로 첸 카이거의 <패왕별희>를 제치고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던 감독이다. <꿈 속의 여인>은 한국에 수입되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스페인 개봉당시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스페인에는 작고 큰 영화제뿐만 아니라, 자국영화에 수여하는 고야라는 영화상이 있는데, 스페인에서는 미국의 아카데미와 같은 권위를 지닌다. 이 영화는 작품상을 비롯해 7개 부분에서 고야상을 수상했었다. 수상 여부가 영화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꿈 속의 여인>은 흥행뿐만 아니라 비평에서도 성공을 거둔 작품인 것이다.

 

<꿈 속의 여인> 1938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시기는 스페인 내전이 끝나고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의 상황이다. 이 때 스페인 영화제작진과 배우 마까레나가 <꿈 속의 여인>이란 독일과 스페인 합작영화에 촬영하기 위해 독일 우파(UFA) 스튜디어를 찾으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우파 스튜디어는 히틀러의 최측근이자 나치정권의 문화선전 부분을 담당하고 있던 괴델스에 의해 지휘되고 있었다. 그런데 권력의 핵심, 괴델스가 마까레나를 좋아하게 되면서부터 생기는 에피소드를 영화는 다루고 있다. 꽤나 무거운 내용을 다루고 있는 듯하지만, 페르난도 트루에바는 <아름다운 시절>에서 그랬던 것처럼 멜로와 코미디를 빌려 가볍게 다가간다. 특히나 영화의 결말은 전형적인 멜로 드라마의 형식을 취한다. 집시 죄수인 레오라는 청년은 마까레나가 출연하는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해, 마까레나를 사랑하게 된다. 영화의 결말은 마까레나가 권력과 부가 아닌 레오를 선택하면서 끝난다. 이러한 결말은 정치적 문제, 역사적 문제 속에서 자신의 영화를 살짝 비켜 세운 감독의 의도를 나타낸다.

 

솔직히 이 영화가 재미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얘기하기는 힘들 것 같다. 페넬로페 크루즈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영화의 재미를 느끼기는 어렵다. 우선 영화가 다루고 있는 역사적 배경도 그렇지만, 영화가 다루고 있는 코미디의 핵심을 즐기기가 어렵다. 영화는 독일과 스페인이 합작영화를 만들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다루다 보니 통역과정에서 생기는 재미들이 있다. 스페인어와 독일어를 모르는 관객들이 자막으로만 그런 재미를 느끼기는 힘들다.


2004.
Posted by pe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