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2007. 10. 13. 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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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모우 張藝謨, Yimou Zhang

 

 

(1951.11. 14-)


 중국영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독은 장이모우와 첸카이거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임권택 감독이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 아니듯, 장이모우 첸카이거도 마찬가지다. 이 둘은 중국 영화계에서 크게 평가를 받으면서도, 대중들은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중국적인 소재를 다루는 그들의 영화들이 중국대중들에게는 지루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상을 타기 위해 일부러 중국적인 것을 골라 만든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둘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거장임에는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이번 호에서는 장이모우에 대해서, 다음 호에서는 첸카이거에 대해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장이모우는 문화혁명의 여파로 산시성 농촌의 한 공장에서 10여년을 보냈다. 문화혁명 때 해방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아직까지 농촌에 남아있었지만 그는 1978년 북경전영학원에 입학했다. 이후 첸카이거의 초기작 <황토지>와 <대열병>등에서 촬영감독을 맡으며, 영화계에서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나 그의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붉은 수수밭>(1987년)이 베를린영화제에서 금곰상을 타면서 세계적으로도 알려지기 시작한다. 문화혁명의 혼란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내용적인 면보다도 붉은색으로 일관된 영상미를 강조한 영화다. 색에 대한 그의 감각은 <홍등>, <영웅>에서 큰 두각을 드러낸다. 하지만 <붉은 수수밭> 이후 지나친 형식미에 치우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후 대표적인 감독들이 보이는 현상 중에 하나다. 일종의 거작과 거장에 대한 강박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장이모는 형식적인 미를 탈피해 <귀주이야기>와 <인생> 등을 제작한다. 이 두 작품은 그가 미시적인 눈을 가지고 중국의 현실에 다가간 작품들이다. <인생>은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타면서, 그는 3대 영화제 모두 석권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후 그는 다시 한 번 전환기를 맡는데, 그 전환기에 있는 작품이 <와호장룡>과 <영웅>이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 보여지듯, 영상미를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보여주는 영상미는 중국의 전통적인 철학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하지만 여기서 필자는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중국을 대표하는 감독 장이모가 보여주는 세계가 중국적인가 하는 사실이다. 그가 그리는 중국적인 세계는 현실을 사는 중국인들의 세계가 아니라, 세계인들이 알고 있는 중국의 세계라는 사실이다. 그를 거장이라 할 수 있지만, 그가 보여주는 세계가 포장된 세계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와호장룡>의 경우는 깊은 철학을 보여준다고 얘기하지만, 그 철학은 누구에게 있는 것 인가. 그 철학이 중국인들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세계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의 영화를 볼 때 주의해야 할 사실 중에 하나이다.


 

2005. 3 by 유쾌한씨

FILMOGRAPHY



배우  
 
1. 유화호호설 (有話好好說, 1997)
2. 진용 (秦俑, 1989)… 몽천방 역
3. 붉은 수수밭 (紅高梁, 1988)
 


감독

1. 단기,천리를 달리다 (單騎, 千里を走る, 2005)
2. 연인 (十面埋伏, 2004)
3. 영웅 (英雄, 2002)
4. 행복한 날들 (幸福時光, 2001)
5. 책상서랍 속의 동화 (一個都不稜少, 1999)
6. 집으로 가는 길 (我的父親母親, 1999)
7. 유화호호설 (有話好好說, 1997)
8. 뤼미에르와 친구들 (Lumière et compagnie, 1996)
9. 인생 (人生, 1995)
10. 트라이어드 (搖?搖, 搖到外婆橋, 1995)
11. 귀주이야기 (秋菊打官司, 1992)
12. 홍등 (大紅燈籠高高掛, 1991)
13. 국두 (菊豆, 1990)
14. 대호미주표 (代號美洲豹, 1989)
15. 붉은 수수밭 (紅高梁, 1988)
 
 
 제작  
 
1. 단기, 천리를 달리다 (單騎, 千里を走る, 2005)
2. 연인 (十面埋伏, 2004)
3. 영웅 (英雄, 2002)
 
 
 각본  
 
1. 단기, 천리를 달리다 (單騎, 千里を走る, 2005)
2. 연인 (十面埋伏, 2004)
3. 영웅 (英雄, 2002)
4. 화혼 (畵魂, 1993)
 
 
 촬영  
 
1. 대열병 (大閱兵, 1986)
2. 황토지 (黃土地,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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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2007. 10. 13.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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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봤을지 기억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누구나 주성치 영화 한 편쯤은 봤을 것이다. 안 봤다고 얘기하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TV하고는 거의 담 쌓고 사는 사람이던지. 주성치가 찍은 영화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이고 설날이다 추석이다 하면 TV에서도 꽤 많이 해줬으니 주성치 영화에 대한 대중의 경험도는 그 누구에도 뒤지지 않으리라. 유쾌한씨는 이런 주성치 영화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식신, 희극지왕 같이 꽤 알려진 영화는 재밌게 봤다. 그런데 유쾌한씨가 가장 으뜸으로 삼는 주성치 영화가 있다면 서유기 선리기연이다. 주성치의 어떤 영화보다도 대중에게 다가섰다는 "소림축구"가 유쾌한씨의 깊은 인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서유기 선리기연을 밀어낼 수 있을지 기대하며 극장을 찾았다.

 소림축구를 보고 나왔을 때 영화 안에 대중성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림축구를 보고 나온 관객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① 매우 재밌다. ② 재미있는데 너무 유치하다. ③ 이게 뭐가 재밌냐!? 헉!' 이걸 나누는 기준은 웃음이다. 결국 이 영화에 있어 대중성이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웃어 주느냐에있는 것이다. 웃기는 영화를 장르로 표현하자면 코미디인데, 이 코미디라는 장르는 대중성이라 대표되는 장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주성치 영화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영화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유쾌한씨는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고 있다. 십여년 동안 쌓아온 주성치의 영화는 장르를 벗어난 영화다. 주성치표 영화라고나 할까. 이러한 주성치의 영화를 미라맥스가 맡으면서 주성치표 영화에서 벗어나 대중으로 다가서고자 했다.
 
  이러한 미라맥스의 노력은 홍콩과 중국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한 여세를 몰아 전 세계로 마수(?)를 뻗치고 있다. 이제 며칠 안 있으면 월드컵이니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주성치 자신은 월드컵을 의식하지 않고 영화를 만들었지 몰라도 미라맥스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주성치의 내한과 함께 한국 영화시장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개선장군 마냥 한국에 입성했다. 이러한 분위기들을 보면 지난 몇 년동안 만들어진 주성치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죽을 썼는지 모를 정도였다. 주성치의 활발한 홍보 활동과 영화의 마케팅 전략은 고조되고 있는 월드컵 분위기와 어우러져 소림축구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전략에 대한 관객들의 대답은? No. 개봉 첫주 스파이더 맨에 이어 박스 오피스 2위를 기록했지만 서울관객은 6만에 약간 못 미치는 숫자를 나타냈다.

  이 영화를 재밌게 본 사람들은 주성치 영화를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읽어내고 같이 웃을 수 아는 사람들인 것이다. 재밌는데 유치하다고 느낀 사람들이나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화를 볼 줄 아는 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유쾌한씨처럼 그냥 평범한 사람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주성치의 열혈 매니아가 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소림축구가 이전으 주성치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때를 잘 만났다는 것이다. 지난 몇 년동안 한국에 들어온 주성치 영화들은 불운인지 행운인지 비디오로 직행했다. 그런 영화들과 달리 소림축구는 정말 때를 잘 만났다. 월드컵도 월드컵이지만, 우선 한국 사회의 문화와 척 들어맞는 시점이랄까. 한국 문화의 유형으로 엽기를 뒤이어 허접이 등장했다. 허접은 지금 한국 사회를 읽을 수 있는 하나의 문화적 코드이다. 허접이라는 문화코드와 소림축구가 맞닿은 것이다. 여기에 엽기를 거치면서 허접으로 도달한 문화코드는 유치함을 받아들이는데 관용적이 되었다. 얼마전 장나라가 열연한(?) "명랑소녀 성공기"를 보라. 그 뻔하고 유치한 드라마가 어찌 대박을 터뜨렸냐 것이다.

  모 잡지에 실린 강우석 감독과 주성치의 인터뷰를 보니, 강우석 감독이 소림축구2에 투자하기로 했다고 한다. 공식적인 것인지, 비공식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지만 소림축국2가 제작되어 한국에서 개봉된다면 지금과 같은 반응은 얻어내기 힘들 것이다. 앞으로 지켜봐야 알겠지만 주성치의 소림축구는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일어난 일시적 현상으로 끝날 것이다.
 
by 유쾌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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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2007. 9. 26.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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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경거리를 하루만 걸어도 느낄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정말 자전거가 많다는 것이다. 자전거는 중국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모습 중에 하나다. 물론 중국 전역에서 자저건가 애용되고 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거짓이다. 또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자전거가 애용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에도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북경의 예를 들자면, 자전거를 타고 어딜가는 도중에 오르막길을 한 번 만날 수 없다. 그만큼 자전거가 편리하게 이용될 수 있는 지형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전거는 중국 60∼70년대에 중산층을 상징하는 부의 척도이기도 했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 발전에 따라, 자전거는 더이상 부의 척도가 되지 않지만 말이다. 마이카 시대로 급속하게 진입하고 중국. 자전거는 더이상 부의 척도를 상징하지 않지만, 여전히 빈부의 격차를 싣고 달린다. 그러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왕 샤오슈웨이 감독의 <북경자전거 十七歲的單車, 2001>이다.
 
시골 소년 ''구웨이''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베이징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다. 베이징에 도착후 그는 택배회사에 취직하여 배달원의 일을 하기 시작한다. 그의 일을 위해 회사는 6백위안짜리 자전거를 그에게 대여해준다. 비록 학업을 계속할 수 없지만, 일자리를 구해 새 생활을 시작하게 된 그는 설레는 마음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열심히 일을 해 나간다. 고생 끝에 자전거 가격에 해당하는 6백위안 거의 모았을 무렵, 그는 자전거를 잃어 버리게 되고 절말에 빠진다. 고생 끝에 낙이 온 것이 절망이 찾아든 것이다. 그는 그의 자전거를 찾기 위해 북경 전역을 뒤지고, 결국에는 자신의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한 소년(지안)을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목격한 그 소년은 불량스럽기 그지 없어, 접근하기 조차 힘들다. 구웨이는 결국 그 소년의 주위를 배회하다가 자신의 자전거를 재차 훔치게, 아니 찾아오게 된다. 하지만 훔치는 도중 그 소년에게 잡히게 되고 몰매를 맞는다. 하지만 자신의 생명만큼이나 소중한 자전거를 지키기 위해, 구웨이는 계속해서 자신의 자전거라 주장한다. 이러한 실갱이 속에서 불량 소년 지안과 구웨이는 번갈아가면서 사용하기로 합의하고 같이 자전거를 사용하게 된다.

 <북경 자전거>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구웨이가 자전거를 잃어 버린 후, 택배회사 경리에게 자전거를 꼭 찾겠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회사 경리는 그에게 “도대체 북경에 자전거가 얼마나 많은 줄 아냐? 너는 현실을 모른다”라고 타박한다. 그렇다. 현재 중국은 사회주의라고 하기에는 낯뜨거운 빈부격차 때문에, 가난한 이들은 현실을 알 수 조차 없다. 하루는 필자가 북경의 거리를 걷다가 슬픔에 절규하는 신문 판매원을 보았다. 그가 화장실 간 사이가 그 파는 신문을 누가 훔쳐간 것이다. 중국에서 신문 1부는 한국 돈으로 60원에서 1백30원 사이다. 그렇다면 그가 잃어버린 신문의 액수가 고작 얼마 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흐느껴 울었다. 그것이 바로 <북경 자전거>가 보여주는 중국의 현실인 것이다.

 

2005. 4 by 유쾌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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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2007. 9. 21.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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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ero


 한국에서 볼 수 있을 만한 스페인어권 영화를 찾다가, 엘 살바도르를 배경으로 한 <로메로 Romero>라는 영화를 골라봤다. 이 영화는 스페인어권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지만, 80년대 중남미의 현실을 단편적으로 바라볼만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1980년 미사 중에 독재자가 보낸 테러리스트에 의해 암살당한 전 엘 살바도르 주교였던 오스카 로메로의 실화를 다루고 있다. 로메로 신부는 다른 것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고, 종교와 속세의 길에 어떠한 경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엘 살바도르 주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 시점은 바로 함베르토 장군이 부정한 방법으로 대통령에 오르는 시점이다. 함베르토는 대통령이 된 이후 독재자로 변모하고,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다. 여기에 주민들은 반발하고 교회의 일부세력도 독재정권에 반발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로메로 신부는 갈등하고 결국은 독재정권에 대한 발언에 나서게 된다. 솔직히 영화를 보면 알지만, 그의 행동이 적극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교가 갖는 힘을 생각했을 때, 그것은 국민들을 하나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구심점이 될 수 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독재정권은 테러리스트를 보내 로메로 주교를 암살하게 되는 것이다.

 대충 영화의 줄거리만 봤을 때, 인권과 자유를 생각하게 해주는 영화이다. 영화를 실제로 봐도 한 번쯤 그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기독교인이라면 더 가슴 뜨겁게 그러한 것들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실존했던 인물을 다룬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렇듯, 다른 측면보다 로메로 신부의 인간적인 측면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종교 영화제작자인 엘우드 키에르에 의해 제작된 영화이니 그런 것이 더하다. 이 영화 속에는 당시 엘 살바도르의 상황, 중남미의 사회적 현실,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정책 같은 것은 없다. 한 명의 성인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면서 드는 가장 큰 의문인, 왜 주교가 중요한가이다. 라틴 아메리카는 콜럼버스가 첫발을 내딛은 순간부터 식민지가 진행된 대륙이다. 이 식민지화의 가장 큰 근거 중 하나는 원시한 인종을 하나님의 자식으로 개종한다는데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교회세력이 진출했고, 기나긴 식민지 기간동안 그들이 기득권층으로 부상한 것으로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독립을 하면서 타파해야 했어야 할 문제이지만 그렇지 못하였다. 그 문제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종교는 그들이 지닌 권력 없이도,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크나큰 힘을 지닌다. 그러니 한 국가에서 교회의 수장인 주교가 갖는 의미는 큰 것이다.

 <로메로>는 단순하게 인권영화, 혹은 종교영화에 그칠 수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을 좀 더 알고 바라보면,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적극적인 대항으로 나서지 않았던, 엘 살바도르 주교 오스카 로메로가 독재정권에 암살당했는가는 그들 사회가 지닌 문제 속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2004. 9

Posted by pekin
영화2007. 9. 21.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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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세 루이스 꾸에르다의 <마리포사 : La lengua de las mariposas> 영화를 알게 된 것은 마누엘 리바스의 영화를 통해서 이다. 마누엘 리바스는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영화는 1시간 30분 동안 이야기를 보여주지만, 그는 불과 20 페이지도 안 되는 종이 속에 이야기를 풀어냈다. 영화는 그의 이야기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잔잔하게 스페인 내전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영화는 스페인 내전의 단편을 다루고 있지만, 극단적이지도 참혹하지 않다. 한 아이의 눈을 통해 그 시대를 보여 줄 뿐이다. 1936년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의 작은 마을, 천식을 앓으며 호기심 많은 몬초라는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몬초는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매일같이 때린다는 형의 말에,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훌륭한 선생님인 그레고리 선생님을 통해 세상을 알아가게 된다. 자연의 소중함을 배우고 정의를 배우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 1936년을 전후한 스페인은 이 훌륭한 선생님을 외면했다. 1936년 프랑코가 내전을 일으키기 까지, 스페인은 왕정, 군사독재, 공화정 등을 급속하게 반복하였다. 이 속에서 사람들이 설 땅은 어디인가. 사람들은 어디에 몸을 기대어야 하는가. 특히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 자신의 신조가 굳은 사람들 그들은 어떻게 처신할 수 있는 것인가. 공화주의 지지자인 그레고리 선생님의 모습은 이 속에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물론 영화는 이러한 모습을 강렬하게 보여주진 않는다. 단지 몬초라는 아이를 통해 비쳐줄 뿐이다. 아직 사고가 정립되지 않은, 호기심 많고 순수한 한 어린 아이를 통해 보여줄 뿐이다.
 
 영화는 잔잔하게 보여주지만 영화를 본 후 강렬한 인상이 남는 것은 마지막 장면 때문이다. 내전 속에서 그레고리 선생님은 공화주의자라는 이유로 끌려가게 된다. 물론 몬쵸 아버지도 공화주의자였지만, 내전이후 발 빠른 대처로 위기를 벗어난다. 공화주의자들이 트럭에 실려 끌려가는 마지막 장면, 그들과 친하게 지냈던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욕설을 퍼붓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떠나가는 트럭을 향해 돌을 던진다. 이때 몬쵸도 어머니에게 떠밀려 돌을 던지려고 뛰어가는 장면, 돌을 던지기 직전의 순간, 이 장면이 이 영화의 마지막이다. 이념이 무엇인지 모르는 한 소년이 존경하는 선생님에게 돌을 던지려는 아이, 그는 무엇에 돌을 던지는 것일까.

 이 영화는 감동과 함께 이념이란 무엇인가, 자유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다루기 어려운 이야기를 아이를 통해 잘 풀어내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당연히 역사적이고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문제를 아이를 통해 관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스페인 내전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단순히 감동만을 선사한다면 문제가 있다. 우리의 역사가 그렇듯, 스페인의 내전도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2004. 9.
Posted by pekin
영화2007. 9. 20.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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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er




굴뚝이 있는 조그만 목욕탕들, 어릴 적에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지금과 같이 집안에서 샤워하기 편치 않던 시절에 대중목욕탕은 서민들이 마음편히 씻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연탄보일러를 사용하던 시절, 마음 놓고 뜨거운 물을 쓸 수 있는 곳은 바로 목욕탕 말고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경제가 발전하고 보일러가 기름, 가스보일러로 바뀌면서 집안에서 샤워하기가 너무 편해졌다. 그런 편리함 이면에 조그만 목욕탕은 점차 사라져 갔고 말이다. 장양 감독의 <샤워 (2001)>도 이러한 모습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선전의 한 자동 샤워 부스에서 한 사내가 샤워를 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사내는 북경에서 대중목욕탕을 하는 아버지를 둔 대명이다. 그는 어느 날 저능아 동생인 이명으로부터 아버지가 침대에 누워있다는 엽서를 한 장 받게 된다. 아버지가 위급한 상황에 있다고 생각한 대명은 급히 비행기표를 끊어 북경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별일이 없다. 아버지가 무사하심을 본 후 선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북경에서 며칠 머물게 된다. 샤워는 그 동안 벌어지는 일들을 보여준다. 중국의 후통에서 대중목욕탕을 하는 아버지와 선전에서 사업을 하는 큰 아들, 둘의 모습은 아버지와 아들, 중국의 과거와 현대를 대비시켜 보여 준다. 영화의 마지막은 후통이 철거되고 그곳에 아파트 건설계획에 따라 목욕탕이 철거되는 장면이다. 목욕탕에서 귀뚜라미 싸움을 하던 동네 노인들은 신식 아파트에서 귀뚜라미는 살지 못할 것이라고 한탄을 하고, 대명과 이명은 목욕탕의 간판을 떼어낸다.

중국에는 전자자동샤워부스나 허름한 대중목욕탕만 있을까. 그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1천원짜리부터 몇 만원이 되는 목욕탕까지 다양한 종류의 목욕탕들이 있다. 고급목욕탕의 경우는 심지어 식사가 뷔페식으로 차려져 있기도 하다. <샤워 (2 001)>에서 보이는 대중목욕탕을 중국의 한 거리에서 마주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까.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지저분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진다. 하지만 그 지저분함이란 무엇일까. 영화의 장면을 빌려보자. 대명과 이명의 아버지가 죽은 아내를 회상하는 장면이 있다. 그의 아내는 산서성 사람이었는데, 그곳엔 물이 귀해 평생 한 번, 결혼하는 날에만 목욕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장인어른은 딸의 결혼을 위해 곡식과 물을 바꿔 딸의 목욕물을 힘겹게 장만했다. 이것이 바로 과거의 모습이었다. 현실의 모습을 보자. 중국에 정말 많은 수의 사람들은 1년에 한번 18원짜리 카오야(북경식 오리요리) 한 마리를 먹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며 대략 2천원을 조금 넘는 돈이다. 시골에서 일을 찾아 북경으로 올라온 민공들의 생활, 그들의 슬픈 삶이 이러한 모습들에 담겨져 있다. 허름한 주택에서 공동생활을 하거나, 거리에서 하룻밤을 해결하는 민공들이 씻을 수 있는 장소란 대중목욕탕이 전부다. 그들에게 씻는다는 것은 어쩌면 사치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목욕탕은 점점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사라져 가고 있다. 이것은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또 하나의 중국의 모습이다.


2005. 5 by 유쾌한씨

Posted by pekin
영화2007. 9. 20.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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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 미니츠 트럼펫>은 세계 거장 감독들의 단편영화를 모아 옴니버스 영화를 만들고자 한 <텐 미니츠 올더>의 2부작 중 1부이다. <텐 미니츠 올더>는 짐 자무시, 빔 벰더스, 첸 카이거 등 7명의 거장이 참여한 <텐 미니츠 트럼펫>과 베르나도 베르톨루치, 장 뤽 고다르 등 8명의 거장이 참여한 <텐 미니츠 첼로>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 유명한 거장들이 참여하다보니 기획에서 상영까지 큰 관심을 끌었지만, 상영된 이후 큰 호평을 받지는 못했다. 이번에 필자가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텐 미니츠 트럼펫> 중에서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첸 카이거 감독의 깊이 감추어진 100송이 꽃 <100 flowers hidden deep>이라는 작품이다.

이미 첸 카이거 감독에 관해서는 그의 작품인 <패왕별희>, <투게더>를 얘기하면서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텐 미니츠>의 마지막 작품인 <깊이 감추어진 100송이 꽃>은 그의 작품인 <투게더>와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어느 날 정체불명의 할아버지가 이삿짐센터 직원들 앞에 나타나 이삿짐을 날라 줄 수 있냐고 물어본다. 직원들은 돈도 없어 보이는 늙은이의 말에 처음에는 모른 척 하지만, 돈을 지불할 수 있다는 말에 할아버지와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도착한 곳은 아무 것도 없는 벌판뿐이다. 아니 이전에는 있었지만 아파트 공사를 위해 모두 철거되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공터일 뿐이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은 할아버지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돌아가려 하지만, 사장의 헛걸음 하고 돌아가느냐 하는 전화에 보이지도 않는 이삿짐들을 나르게 된다. 그들은 할아버지가 미쳤다고 생각하지만, 할아버지의 심각한 모습에 낑낑대며 짐을 나른다. 짐을 다 나른 후 할아버지와 직원들은 차를 타고 보이지도 않는 집을 떠나 보이지도 않는 새로운 집을 향해 간다. 출발한지 얼마 안 지나, 할아버지는 이전에 있었던 구덩이를 조심하라고 하지만, 직원들의 눈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차는 구덩이 빠지고, 그곳에서 할아버지는 예전 집에 달려있던 종을 발견한다. 그 종을 집에 달면서 영화는 한편의 동화처럼 이전의 집들이 판타지처럼 펼쳐진다. 그때, 직원들은 볼 수 없었던 예전의 집들을 보면서 영화는 끝난다.

영화의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것까지 간단하지는 않다. 중국은 급속한 경제발전 속에서 과거의 공간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겪은 모습과 똑같은 것이다. 하지만 사라져 가는 공간은 사라져 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많은 것을 잃게 하고, 우리 자신을 과거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한다. 영화 속 할아버지처럼, 과거에 연연하고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정신병자로 취급받을지 모른다. 그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판타지 일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듯, 직원들은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느 한 상황 속에서 잊고 있던 모습을 바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메시지이자, 아직 희망은 있다는 메시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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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2007. 9. 20.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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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씨는 장예모 감독의 <영웅>이 오기를 한참을 기다렸다. 드디어 어제 영화를 봤고 기다림에 대한 대답은 혼란스러움이었다. 영화에 대한 긍정과 부정 속에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영웅>은 “색 色”의 사용과 드러냄에 있어 너무나 탁월하면서도 전체주의의 가치와 단선적인 스토리라는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며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와호장룡>과의 끊임없는 비교를 유발시킨다. 이 속에서 어떠한 답을 내려야 하는 것인지, 유쾌한씨는 참으로 어지럽다.

영화를 “이미지의 예술이다.”라 말하고, “이미지는 색으로 만들어 진다.”라 말한다면, 장예모 감독의 <영웅>은 최고의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예모가 <영웅>을 통해 보여준 색은 정말 대단하다. 이 영화가 지니고 있는 전체주의적 사고를 비판하는 사람들이라도 이 점은 인정할 것이다. <영웅>에서 보여지는 색, 정말 대단하다, 가슴 벅찰 정도로. 장예모가 펼치는 색의 향연 속에서 色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 영화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색의 의미를 읽어나가는 과정이 <영웅>을 보는 과정이다. 그것이 종국에 이르러서는 감독이 규정하는 색의 의미를 드러내지만 장예모의 시각에 동조할 필요는 없다. ( 물론 중국에서 이 영화는 대박을 터뜨렸고,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그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씁쓸. )

<영웅>의 색들은 무명(이연걸)과 진시황이 될 영정의 대화 속에서 드러난다. 영정을 시해하고자 했던 고수들을 해치우고 온 무명은 영정을 알현하게 되고 그 동안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색의 향연들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영웅>에서 보여 지는 색은 고정적이지 않으며 매우 유동적이다. 어떠한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그래서 무영과 영정의 대화는 에피소드 단위로 진행되는데, 각 에피소드마다 색이 변화한다. 에피소드를 지나면서 인물들과 배경들은 黑, 赤, 靑, 綠, 白으로 갈아입는다. (순서는 무관합니다. ^^) - 영정은 항상 黑 이다. - 이러한 변화가 어지럽긴 하지만, 어지러움 속에서 색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준다. 고정관념이 깨져가는 과정을 인식하기는 어렵지만 색에 대한 읽기를 시도하는 순간 색에 대한 고정된 관념은 깨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색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읽어내는 의미 속에 있는 것이다.

유쾌한씨는 <영웅>을 보는 동안 <영웅> 안에서 읽혀질 수 있는 색들의 의미가 그려졌다. 그러한 의미는 유쾌한씨式 읽기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유쾌한씨처럼 자신 나름대로 <영웅>에서 보여 지는 색에 대한 읽기를 시도하지 않으면 장예모가 규정한 색의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지 모른다. 이것은 매우 위험하며 읽기를 시도하는가의 여부는 영화를 보는 관객 자신에게 있다. 그래서 유쾌한씨는 <영웅>을 높게 평가한다. <영웅> 자신이 커다란 위험을 내포하고 있지만 말이다.

“색色”, 이것은 <영웅>을 좋은 영화로 만들어 주고 있지만 이 부분만을 가지고 영웅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며 위험하다. <영웅>은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동일한 인물에 다른 색을 입힌다. 각각의 에피소드를 한 장으로 중첩시키면 내면의 충돌과 갈등이다. 하지만 중첩된 색들이 하나로 만들어질 때는 어떤 색일까. 바로 “검정”이다. 각 인물들은 에피소드가 하나하나 진행될 때마다 다른 색을 보이지만 종국에는 영정이 변치 않고 지니는 색 “검정”이라는 얘기다. 영정은 훗날 진시황이 될 인물, 그가 상징되는 것은 곧 천하요 국가이다. 이 얘기를 좀더 다르게 하자면, 국민 개개인은 고유한 색을 띠며, 그 색은 상황과 시각에 따라 변하지만 그것이 하나로 묶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黑 이다. 그리고 다른 색들이 지니고 있는 변화로움에 비해 黑은 고정적이다.

장예모의 <영웅>은 영화로 드러낼 수 있는 색의 극치를 드러내면서, 영화 읽기의 풍성함을 자아내는 훌륭한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 훌륭함은 고정적이며 닫힌 시선 속에서 그 빛과 깊이를 잃었다.






by 유쾌한씨






Credit


 

Actor


 주연
이연걸  :  무명 역
장만옥  :  비설 역
양조위  :  파검 역
 
조연
견자단  :  은모장천 역
장쯔이  :  월 역
진도명  :  진왕 영정 역
 
 
 
 Step
 
 연출 부문
장이모우 장예모 :  감독
 
각본 부문
장이모우 장예모 :  각본
Wang Bin  :  각본
 
촬영 부문
크리스토퍼 도일 두가풍 :  촬영
허우 용 Yong Hou :  촬영
 
제작 부문
Zhenyan Zhang  :  제작팀장
윌리암 콩 William Kong :  제작
장이모우 장예모 :  제작
 
음악 부문
탄 둔 Tan Dun :  음악
 
프로덕션 디자인 부문
후오 팅샤오 Tingxiao Huo :  미술
Zhenzhou Yi  :  미술
 
스턴트 부문
정소동  :  무술감독
 
의상 부문
와다 에미 Emi Wada :  의상
 
편집 부문
임안아  :  편집
Ru Zhai  :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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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2007. 9. 18.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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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 tu mama también



중남미에 관심이 많은 유쾌한씨는 중남미 영화들은 웬만하면 다 보려고 노력한다. 얼마 전 조그맣게 열렸던 ‘라틴영화제’에 시험에 쫓기어 가보지 못한 유쾌한씨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이투마마 (Y tu mama también)>의 시사회가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중남미 영화는 모두 정치영화라는 얘기도 있지만 헐리우드에서 성공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자신의 고향인 멕시코를 배경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어낼지 하는 순진한 호기심으로 시사회장을 찾았다. 첫 장면부터 당황하게 만드는 정사신....

알폰소 쿠아론은 우리에게 <위대한 유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문학적 소질이 다분히 있는 것 같다. 그를 스타 감독으로 - 해리포터 3편의 감독으로 선정됐으니 그는 분명 스타감독이다. - 만든 <위대한 유산>이나 이전에 그의 재능을 보여준 <소공녀> 모두 유명한 소설을 원작으로 했으니 우연이라고 하기엔... 그런 그가 동생인 카를로스 쿠아론과 함께 <이 투 마마>의 각본을 써 2001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고 각본상을 수상했다. 이정도 되면 그를 문학적 감독으로 불러도 좋으리라. 그런데 미국을 무지 싫어하는 멕시코인들이 헐리우드의 스타 감독이 된 그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건 유쾌한씨도 모를 일이다. ^^ 적지에서 성공한 영웅으로 볼 수도 있구, 나라를 저버린 매국노라고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제작을 눈앞에 두고 내놓은 <이 투 마마>는 그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준다. 역시 그는 멕시코인 이다.

한 나라의 예술작품을 대할 때 우리는 보여주는 것만 느낄 수 있기도 하고 그 이상을 느낄 수도 있다. 그 이상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유쾌한씨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인가 알고 있을 때 그 이상 느낄 수 있을 가능성은 분명 커진다. 그런데 우리는 중남미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 이 얘기는 멕시코 영화인 <이 투 마마>에도 해당된다. 정사신으로 영화를 여는 이 영화에 대해 성적담론으로 가득 찬 야한 영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으며, 성장 영화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 정도로만 이해한다면 이 영화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물론 유쾌한씨의 이런 생각이 남들에게는 정치적으로 읽으려는 억지로 여겨질 수 있다. 어쩌면 이런 인식들이 이제껏 중남미 영화들을 정치영화로 둔갑시켰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쾌한씨는 <이 투 마마>에서 너무나 슬픈 멕시코를 보았다.

<이 투 마마 땀비엔 Y tu mama también>이라는 말은 “그리고 너의 어머니 역시”라는 뜻이다. 이 말만 가지고는 우리는 어떠한 얘기도 할 수 없다. 우리가 영화를 보고 난 후 우리는 여기에 이 말 저 말 붙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말을 붙이냐는 각자가 영화를 어떻게 보느냐이다. 이 말은 한없이 음탕하게 들릴 수도 있고 한없이 서글프게 들릴 수도 있다. 그것은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유쾌한씨는 제목만으로도 슬퍼진다.

절친한 친구인 테녹과 홀리오는 테녹의 사촌형의 부인인 루이사와 함께 갑작스런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행지는 그들도 알지 못하는 “천국의 입”. 알지 못하는 곳이기에 여행은 그들이 가는 길이 어디인지 조차 모른다. 그냥 가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가다 자신들도 모르게 도착한 곳이 바다이고 원주민 가이드의 도움으로 우연찮게 천국의 입에 가게 된다. 테녹과 홀리오가 루이사를 꼬시기 위해 가상으로 만들어낸 장소가 현실로 닿게 된다. 가상과 현실은 무의미하며 그곳에는 배관광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원주민이 있다. 천국의 입까지 다녀온 그들은 해변으로 쳐 놓은 텐트로 돌아온다. 그런데 텐트는 돼지들로 엉망이 되어 있다. 어쩔 수 없이 원주민 가이드의 집에서 묵게 되는데.... 어차피 텐트란 임시적인 거처가 아닌가. 중남미 문학에서 심심찮게 쓰이는 돼지가 망쳐놓았다는 사실이 재밌긴 하지만 말이다.

원주민 가이드의 집에서 일박을 하게 된 그들은 진탕 술을 마시면서 화해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테녹과 홀리오는 서로의 애인을 범했다는 사실에 멀어져 있었다.) 그리고 셋은 방으로 들어가 섹스를 하게 되는데 이 장면이 압권이다. 이 부분을 묘사한다는 것이 참으로 껄끄러운데 심의를 통과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도 많이 관대해지긴 해졌나 보다. 이 섹스는 동성과의 관계이자 이성과의 관계이다. 즉, 테녹과 홀리오와의 관계이자 테녹과 루이사, 홀리오와 루이사의 관계인 것이다. 마치 마술적인 꿈같다. 꿈에서 깨어나면 현실로 돌아오지만 말이다. 이 장면에서 유쾌한씨는 멕시코의 국기가 생각났다. 삼색기에 하얀색으로 된 가운데 부분에는 독수리가 뱀을 물고 피를 흘리는 멕시코의 국기.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유쾌한씨는 차파티스타민족해방군(EZIN)에 대해 얘기할까 한다. 멕시코 남부에 원주민들이 주로 사는 치아파스 주가 있다. 이곳의 원주민들은 멕시코 국민임에도 불구하고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그저 착취만 당할 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 시티는 허상이다. 멕시코의 원주민은 슬프다. 우리는 그러한 현실을 영화 속에서 가벼지만 느낄 수 있다. 남쪽으로 내려갈 수록 검열이 심해지는 군인들, 마치 우리의 옛 군사정권을 보는 듯 하다. 그나마 우린 행복하다.

사족 : 차파티스타 민족 해방군의 부사령관이 쓴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라는 책이 해냄 출판사에서 올해 출간되었습니다. 우리가 무지한 중남미의 멕시코, 그 안의 차파티스라는 곳에 시선을 돌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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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2007. 9. 1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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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영화가 베니스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는 내용을 봤을 때, 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을 할까 하는 의심을 했다. 중남미에 관심이 많은 유쾌한씨는 꼭 보고 싶었으나 개봉을 안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많은 영화들이 수입되고 만들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면이 많다. 솔직히 어려운 점이 많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그나마 크고 작은 영화제들이 많아져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지만 말이다. 어쨌든 불행 중 다행으로 <프리다>는 한국에 수입되어 개봉되었다. 물론 그 전에 어렵게 구한 DVD로 보기는 했지만 말이다.

 <프리다>가 한국에서 개봉되는 것을 보면서 ‘역시 영화는 산업이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됐다. <프리다>가 한국에서 개봉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대형 서점을 한 번 둘러보면 대충 감이 잡힌다. 그냥 일반인들을 붙자고 물어보자. “중남미 화가 중에 아는 사람 있으세요?”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 이나 있을까. 유쾌한씨도 마찬가지지만 중남미에 거의 무지몽매하니 알 리가 없다. 그런데 서점에 가면 잘 보이는 곳에서 프리다 칼로에 관한 책을 찾아 볼 수 있다. 소설 같은 그녀의 삶은, 한국에 많이 소개되었고, 감동과 삶에 대한 성찰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조금 상업적으로 얘기하자면, 팔릴만한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출판사들도 땅 파서 책 내는 것 아니니, 이윤에 전혀 무관심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 덕택에 그나마 프리다 칼로는 한국에서 많이 알려졌고, 소수의(?) 팬 층을 확보하였다.(유쾌한씨도 그 중 한명이다.) 이런 기반 속에서 영화 <프리다>는 한국에 수입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지금 유쾌한씨는 영화 얘기는 안 하고 약간 잡다한 얘기를 하고 있다. 왜? 솔직히 전기영화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전기영화의 경우 영화화 하는 대상에 기대기 때문에 졸작의 수준은 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 인간의 삶보다 영화를 더 극적으로 만들기는 정말 어렵기 때문에 명작의 대열에 끼기도 어렵다. 그러다 보니 범작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솔직히 <프리다>도 그렇다. 프리다 역을 맡은 셀마 헤이익이 정말 프리다 칼로와 닮기는 했지만, 열연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관객들이 느끼는 감동의 수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 느끼는 바가 다르겠지만 유쾌한씨가 봤을 때는 아니다. 프리다 칼로의 삶은 영화에서 보여 지는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감독의 문제이겠지만, 이 영화는 프리다 칼로가 삶에서 느꼈을 처절함이 없다. 그녀의 작품을 볼 때 느껴지는 계속해서 추락하는 듯한 절규가 없다. 그러니 이 영화의 감독인 줄리 테이머 보다 프리다 칼로가 더 유명한 것이겠지만.

 프리다 칼로의 작품은 미국 미술 경매 시장에서 중남미 화가들 중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작품이다. (이러니 영화가 만들어졌겠지만.) 이러한 사실로 프리다 칼로가 디에고 리베라 보다 더 유명한가 보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아니다. 프리다 칼로의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가 예술적으로, 중남미 미술계에 끼친 영향력으로나 프리다 칼로 보다 더 큰 존재이지만, 디에고 리베라의 주요 작품들은 벽화이니 그것을 띠어다가 팔수는 없으니까. ^^. 이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 이 영화를 보다 보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어떤 것들이냐면 프리다 칼로의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보여 지는 디에고 리베라의 삶이다. 프리다 칼로의 삶에 매혹되어 디에고 리베라는 바람둥이로 인식하기 십상이다. 물론 진짜 바람둥이기는 했지만. 록펠러 빌딩에 그림을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아들인 것도 웃기는 얘기였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사상으로 고취되었던 미국에 가서 활동을 하고, 록펠로 빌딩에 혁명적 그림을 그리려 했던 것도 참 재밌는 일이 아닌가. 디에고 리베라의 삶과 함께 또 눈여겨 봐야할 것은 당시 멕시코의 역사적 상황이다. 언제 멕시코가 사회주의 국가였는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중남미의 대부분 국가들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었으며, 멕시코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 시기 우리나라 대사관은 중남미 없었고, 북한 대사관이 있었다. 오늘날은 그 반대지만. 어쨌든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역사적 상황들은 일면적으로 사실이긴 하지만 별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또한 프리다 칼로의 삶은 당시 역사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렇듯 프리다 칼로도 디에고 리베라도 머리 보다는 가슴으로 움직이던 사람들이었지만.

<프리다>, 영화로 봤을 때 수작이라고 할 수 없지만 즐기고 생각할 만한 영화다. 그리고 다른 문화권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유쾌한씨는 영화보다는 프리다 칼로를 만나는 재미에 유쾌했었으니까.

Posted by pe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