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ijing in china2009. 2. 12. 11:47
 

2006/11/03 00:06

베이징 오리 요리인 카오야(烤鸭)하면, 가장 먼저 떠 오르는 곳이 취안쥐더이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뭐랄까, 약간 느끼하다고 할까. 거기다 이름에 걸맞게 가격도 비싸다. 그런데 서비스는 그 이름에 걸맞지 않는다. 흠흠. 중국인들은 식당을 선택함에 있어 맛을 제일 우선으로 삼음으로 나름대로 이해가 가긴 하지만.

 

 며칠 전, 취안쥐더 보단 이름이 덜 하지만, 꽤 유명한 '다둥(大董)'이라는 카오야 집을 다녀왔다. 맛도 괜찮고, 서비스도 좋다. 거기다 취안쥐더 보다 가격이 저렴하다.(한마리에 98원, 반마리도 시킬 수 있다.) 이 집 카오야는 취안쥐더보다 향이 덜 하지만, 기름기가 적고 맛이 담백하다.

 

 카오야를 시키면, 나오기 까지 20-30분 정도 기다려야 하는데, 그것은 오리를 초벌만 해두었다가, 손님이 오면 재벌을 하며 나오기 때문이다. 카오야를 시킬 때는 카오야를 먹을 때 같이 싸먹는 장과 파, 오이 등도 같이 시켜야 한다.(烤鸭调料 8원 : 葱丝,甜面酱,白糖,蒜泥,黄瓜丝,红萝卜丝,咸菜) 카오야가 나오면, 직원이 와 카오야를 먹는 3가지 방법을 가르켜 준다. 첫번째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오리고기와 파를 장에 묻혀 전병에 싸 먹는 방식이다. 두번째는 오리고기와 오이, 红萝卜丝를 장을 묻혀 전병 위에 얹고, 마늘 갈은 것을 함께 넣어 먹는 방식이다. 마지막은 바삭바삭한 오리 껍질을 설탕에 찍어 먹는 방식이다. 두번째 방식은, 카오야를 먹을 때 처음 먹어 보는 것으로, 입안에 마늘 맛이 감돌아 꽤 괜찮다. 그래도 전통적인 방식이 최고지만. ^^

 

 식사를 어느 정도하고 나면, 오리의 살코기를 잘라내고 남은 뼈로 끊인 탕이 나온다. 이 탕은 남은 뼈를 집에 가지고 가지 않을 때, 나오는 것이다. 만약 뼈를 가지고 가고 싶다면, 식사를 시킬 때 얘기하면 된다. 그리고 탕이 먹고 싶다면, 시키면 되는데, 조그만 국그릇에 나오는 한그릇이 2위안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후식이 제공된다. 후식으로는 간단한 과일과 함께, 杏仁豆腐(두부를 후르츠에 넣어 만든 것),小米粥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한가지가 더 있는데 생각이 잘 안남)
 
전반적으로 괜찮은 카오야 집이었다. 들어갈 때는 몰랐는데, 나올 때 보니 별 5개 짜리 식당이었다. 오홋~. 메뉴가 중문과 일문으로 될 정도로 일본사람들도 많이 오고, 서양사람들도 간간이 보였다. 들어갈 때는 몰랐는데, 나올 때 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물어보니, 저녁시간에는 보통 30분에서 1시간 정도 기다려야 된단다. 그러니 예약을 하고 가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기다리는 동안에는 간단한 음료 등을 마실 수 있는데, 북경에서 꽤 놀라운 사실이었음. 개인적으로 다른 이에게 추천하고 싶은 식당이다. 지리적으로 가기 꽤 번거럽긴 하지만....

 

 

by 유쾌한씨

 

 

 

 

 

 

* 가는 길: 산리툰에서 동쪽으로 400-500m 정도 거리에 있다. 밑에 지도 참조.(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주소: 朝阳区团结湖北口3号楼(长虹桥东南侧)
전화번호 : 010-65824003 65822892

 


 


 

 

 

 

 

 

 

건너편에 있는 兆龙饭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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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ijing in china2009. 2. 12. 11:40
 
2006/12/17


2008
년 올림픽을 앞두고, 북경시가 시내 전체를 개발을 하고 있는 탓에 공기 좋을 날이 없지만, 가끔 북경의 녹지공간과 공원이 매우 많다는 사실에 가끔 놀라곤 한다. 천년의 고도, 황제와 황족의 도시였으니 뭐 이상할 것도 없지만 말이다. 황제가 남긴 유적들은 북경 시민들에게 도시 생활의 여유로움을 제공하는 안식처이다. 북해공원, 이화원, 명원, 천단공원 등등, 그 모든 곳이 황제의 전유물이었지만 이제는 시민들의 쉼터가 되었다.

 

 신경보에 따르면 북경시는 그저께부터 2007 1 15가지 공원연표(年票) 판매에 들어갔다고 한다. 공원연표라는 것이 무엇인가, 일정 금액을 내고 공원연표를 구입하면, 연표에 기제된 공원을 제한없이 출입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공원을 입장료만을 포함하는 것이지, 공원 안에 별도로 지불해야 되는 시설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가격등급은 50, 100, 200원으로 구분되는데 50원은 60세이상의 노인, 100원은 55세 이상의 퇴직자, 200원은 신분의 제한 없이 구매할 수 있다. 신분증과 증명사진 한 장이면 쉽게 만들 수 있다. 구입처는 각 공원의 매표소이다. 들어갈 수 있는 공원은 이화원, 천단, 북해공원, 경산공원, 북경동물원, 향산공원, 북경 식물원, 이화원, 대관원, 원명원등 17개 공원이다. 2006년 연표의 경우 131만장이 판매되었으며, 2007년 연표는 145만장이 팔려 나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중국돈 200원이면, 한국 돈으로 2 5천원 정도의 가격이다. 이 가격은 실제로 중국 사람들에게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다. 그렇다면, 북경시는 왜 공원연표 제도를 실행하고 있을까. 일정 수준의 공원 관리 비용의 충당과 공원 관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이다.

 

 

 

 


 

이렇게 줄을 서서 표를 사는 사람들, 추운 날씨이지만 오늘 하루의 고생이 1년 동안의 여유러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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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ijing in china2009. 2. 12. 11:37
 
베이징 상무인서관 근처 골목

 
 
 
 
하루종일 걸어도 지치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도시
 
구석 구석의 숨겨진 매력을 가진 도시
 
그 도시가 바로 베이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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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ijing in china2009. 2. 12. 11:26
[07호] 베이징의 교통 2007.07.20 17:14
http://paper.cyworld.com/beijing2008/2175730
 

중국을 한 번쯤 여행 해 본 사람이라면, 놀라울 정도로 자전거가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중국 전체가 자전거로 넘쳐 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이란 나라가 큰 만큼, 다양한 도시들이 존재하고, 그 도시의 환경에 맞게 각양의 교통 공구들이 발달해 있다. 충칭이나 청두 같은 도시에서 자전거를 타고 생활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일 것이다. 반대로, 대부분 평지로 되어 있는 베이징에서 자전거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이다. 미국에서는 한 집에 여러 대의 자동차가 있다면, 베이징에서는 한 집에 여러 대의 자전거가 있는 것은 보통이다.

 

 이미 중국은 자동차의 시대로 접어 들었고, 자동차 수는 일년에 15-20% 정도로 가빠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지만, 베이징 사람들에게 자전거는 여전히 생활과 떨어질 수 없는 필수품이다. 왜 그런지 베이징에서 생활해 본 사람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학교에 갈 때, 시장에 갈 때, 출근을 할 때, 수많은 사람들의 자전거를 이용한다. 내리막 길도, 오르막 길도 없는 베이징에서, 그저 천천히 페달을 밟기만 하면 된다. 베이징 사람들이 타는 자전거를 보면 '기어'가 달린 자전거가 거의 없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특별히 '기어'가 필요없기 때문이다. 그 뿐인가, 자전거 도로는 얼마나 잘 되어있는가.

 

 잠깐 베이징의 교통에 대해 짚고 넘어가 보자. 북경은 황제의 도시이다. 중화인민 공화국이 세워진지 50년이 넘었지만, 베이징 곳곳에는 황도의 자취들이 수없이 많다. 베이징의 교통 역시 황제가 남긴 유산이다. 2008년 올림픽을 앞두고 대규모의 도시 정비 사업을 하고 있지만, 베이징은 "파괴-회복" 속에서 만들어진 도시가 아니다. 과거의 유산과 공간 속에, 확장을 거듭한 도시가 바로 베이징이다. 그 확장은 이미 1,000년이 넘었다. 베이징의 교통 시스템은 매우 복잡한데, 그것은 바로 과거의 도시 구조를 그대로 이어 받고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의 전통적인 도로 형태를 보면, 육로와 수로가 있고 게다가 수로는 또 운하와 바다길로 나뉜다. 도로의 기능으로 본다면 황실 사람들이 가는 있었고 보통 상인의 길도 있었다. 군용도로, 관가 우편 전문 역도도 있었다. 교통 도구를 살펴보면, 호화로운 배도 있고 관료의 가마도 있었다.  상인의 민용 마차, 작은배 그리고 소, 당나귀, 말, 낙타 등도 있었다. 청말 이래로 근현대의 철로, 대로, 도시의 큰 대로 그리고 기차, 자동차, 궤도전차등이 출현했다. 이러한 복잡한 교통구조는 베이징 도시기능의 복잡성 및 주민 구성의 복잡성을 반영하며 몇 대의 황실 및 봉건황실의 소재지라는 영향을 받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청조 말년에 북경의 교통도로는 현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서방 공업문명은 오래된 중국 농업문명에 큰 충격을 주었고, 서방 열강의 침략 이후 개혁세력과 보수세력의 격렬한 투쟁 중에 드디어 북경의 교통은 현대화로의 어려운 발걸음을 내딛었다. 민국에 이르러서는 황족들의 시설을 없애고, 도로를 개선하기 시작했으며  대중교통수단을 만드는 등 베이징의 교통 시스템은 현대화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베이징의 도시 교통 현대화는 다른 대도시에 비해, 그 발전이 매우 늦었다. 한 예로, 베이징에 전차가 등장하는 것은 1920년대 인데, 이것은 티엔진, 상하이에 비해 10년 정도 늦은 것이 었다. 뿐만 아니라, 전차의 도입 이후, 베이징에서 전차 이용률은 티엔진, 상하이에 비해 낮았으며, 노선 또한 적었다. 이는 베이징이 상하이나 티엔진과 달리, 전통적으로 교통이 발달한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새로운 교통 도구와 시스템이 도입되었지만, 전통적인 교통 도구를 밀어 내기에는 매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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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kin
beijing in china2009. 2. 12. 11:25
[06호] 북경 수도 박물관 이야기 2006.10.11 22:59
http://paper.cyworld.com/beijing2008/1830871
 

북경시는 4년에 걸쳐 북경수도박물관 신관을 지었다고 해 간게 지난 12월이 었다. 구관은 한 번도 안 가본 내가, 대영박물관 소장품 특별전시가 있다 해서, 수도박물관을 다시 찾게 되었다. 수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소장품의 수는 20만여 점에 달하는데, 구관이 전시할 수 있는 규모는 500여 점 정도였다 하니 신관 건설에 필요성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작년 12월에 개관한 신관은 지하 1층, 지상6층으로 5,000-6,000여 점 정도 전시할 수 있는 규모라 한다. 대충 대충 보더라도, 족히 4-5시간은 소요된다. 자세히 보면 하루로는 부족할 듯 싶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개인적 취향에 달렸지만...


 수도박물관은 북경의 선사시대 부터 현대까지 모습을 보여주고, 그와 관련된 유물들을 전시한다. 북경민속전 코너에서는 라오베이징의 생활상을 재현해 놓고 있다. 뿐만 아니라, 라오 베이징의 먹거리를 맛 볼 수 있고, 6층에는 양평 회관 희극 공연장(陽平會館戲樓)는데 그곳에서 동영상으로 나오는 경극을 관람할 수도 있다. (양평회관 희극공연장은 숭문구 전문외소 후통(崇文區西北部 前門外小江胡同)에 위치한 공연장으로, 명대에 세워져 청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북경에 현존하는 회관 중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수도박물관은 보는 재미와 함께 즐기는 재미에도 나름대로 배려를 해 두었다. 북경민속관에 옆에는 라오베이징들이 즐겨 놀던 장남감들이 있어, 가지고 놀 수도 있구, 퀴즈, 다른 그림찾기 등 게임들도 설치되어 있다. 게임은 수도 박물관 홈페이지에 가면, 인터넷으로 즐길 수 있다. (수도박물관 홈페이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든다.)

수도박물관 홈페이지 : http://www.capitalmuseum.org.cn

수도박물관의 다른 그림찾기 게임

http://www.capitalmuseum.org.cn/Contents/Channel_179/2006/0125/1272/content_1272.htm

 

 

 

 

1. 생각보다 잘 되어 있는 내부시설들. 지하에는 부페식 식당도 있다.

근데, 박물관 내부에서 아이스크림은 안 팔았으면 좋겠다. 훗.

 

 

 

 

 

 

 

 

전시물...

1. 大肚弥勒佛像

明(公元1368-1644年)
銅 
高20.5厘米

 

 

 

2.普賢菩薩像
明嘉靖十一年(公元1532年)
銅鍍金
高42.5厘米

 

 

 

3.定窯白釉童子誦經壺
北宋(公元960-1127年)
高27厘米 口徑3.3厘米
北京順義遼代淨光舍利塔基出土

 

 

 

4.江樓閣圖軸 /陳卓
淸代
紙本設色
縱221.2厘米 橫119.5厘米

 

 

 

 

5.房山雲居寺圖軸 /鄒一桂


橫49.5厘米 縱119.5厘米

 

 

 

6.絳色緞緝米珠彩繡雲龍海水江崖紋0袍
淸 嘉慶
長141厘米 通袖寬214厘米

 

 

 

7.

 

 

 

8.

 

 

9.

 

 

 

10. 이것의 정체는 바로 소방차.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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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kin
beijing in china2009. 2. 12. 11:24
[05호] 국경절의 천안문 2006.10.08 12:19
http://paper.cyworld.com/beijing2008/1823298
 
 

 

 

천안문 광장에 가면 가장 눈에 띄는 것 중에 하나가 마오쩌둥의 초상화이다. 중국인들에게 마오쩌둥이 지니는 의미는 특별하겠지만, 그 초상화를 볼 적마다 저 초상화가 언제쯤 천안문에서 영원히 사라질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빠르게 변화하는 중국 사회 속에서 마오쩌둥은 모순된 존재인, 그가 천안문 광장에서 사라져야 중국에 진정한 변화가 오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은, 해리슨 E. 솔즈베리가 쓴 <<새로운 황제들>>에서 언급한 것 처럼 여전히 중국의 황제이다. 참으로 이상한 것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 됐을 때, 천안문에 걸린 마오쩌둥의 초상은 분명 개국을 기념을 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지금까지 내려오지 않고 그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더욱 아이러니는 국경절이 되면 천안문 광장에 손중산의 초상이 세워진다는 것이다. 현대 중국의 국부로 여겨지는 손중산이 국경절에 천안문 광장에 세워지는 것이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천안문 광장에 세워진 손중산의 초상과 마오쩌둥이 초상이 마주 보고 있는 걸 보면, 참으로 묘한 생각이 든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세워짐으로 역사의 승리자는 마오쩌둥이었겠지만, 그 둘이 지금의 천안문 광장에 서 대화를 한다면, 활짝 웃을 수 있는 자는 바로 손중산일 것이다.

 

 

 

 

 

 

 

 

천안문에 걸려 있는 마오쩌둥 초상화에 관한 이야기.

 

마오쩌둥  첫 초상화를 그린 인물은 국립예전가(國立藝專家) 실용 미술계 교수였던 저우링전(周令釗)이 그린 것이다. 이후 1950년 북경시인민미술공작실(北京市人民美術工作室) 신망(辛莽)이 그린 그림으로 교체된다. 당시 신망은 초상화에 대한 경험이 적었기에  초상화에 경험이 많은 쩌후이(左輝), 장쑹허(張松鶴)을 불러 함께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완성하였다. 신망이 그린 초상화는 1950년 국경절에 교체되었다. 1953년 이후에는 중앙미술학원(中央美術學院) 교수였던 장전스(張振仕) 그린 초상화가 천안문에 걸렸다.장전스는 11년 동안 천안문에 걸리는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1964년 심리적인 압박 등으로 초상화 작업을 포기한다. 1964년 부터, 미술공사(美術公司)의  왕궈천(王國陳)이 그린 그림이 걸리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천안문에서 보는 작품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그가 1992년 퇴직 후에는 그의 제자인 거샹오광(葛小光)이 마오쩌둥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하여 오늘날 까지 그리고 있다. 천안문에 마오쩌둥의 초상이 아닌 사진이 걸린 적이 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죽었을 때, 신화사에서 제작한 마오쩌둥의 흑백사진이 천안문에 걸렸었다. 마오쩌둥이 초상화는 매년 교체되며,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4번째 판본이다.

 

 

 

 

 

 

 

국경절이 되면 마오쩌둥이 초상화가 교체되는 동시에, 손중산이 천안문 광장을 차지하고, 누군가 정한 중국의 기념비적인 것들이 매년 다른 것들로 광장에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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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kin
beijing in china2009. 2. 12. 11:20
[03호] 老北京拍記隊的胡同“保衛戰” 2006.06.21 00:23
http://paper.cyworld.com/beijing2008/1505226
 
 

 老北京拍記隊的胡同“保衛戰”

 

 

 

 

(신징바오 2005년 3월 3일자 기사) 대략의 내용 정리 >>>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북경 후통 중간에 사진기를 든 한 줄기의 대오가 출현했다. 이 집단은 매주 인터넷에서 약속을 한 후, 함께 점점사라져 가는 북경 후통을 함께 사진에 담는다. 그들은 스스로 "라오베이징촬영기록단老北京拍记队이라고 부른다. 철거의 발걸음에 따라 그들은 렌즈를 수천 개의 후통에 돌려, 20여만장의 사진을 남겼다. 그들은 이 사진을 통해 인터넷 상에 하나의 완정된 후통의 세계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들이 보기, 도시의 빠르 변화 앞에, 그것은 유일한 선택이다.

 

 그들은 2월 22일에 조직된 팀을 이끌고 후통 거리에 나섰다, 그중에는 대학생도, 있고 환갑의 나이의 노인도 있었다. 하지만 그날 그들이 촬영하기로 계획한 10개의 후통 거리 중에서 이미 2개의 후통 거리는 철거로 인해 고별을 한 뒤였다.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61세의 라오장은 "우리는 현재 완저히 철거의 발걸음을 좇고 있다. 우리의 목적은 완정하고 객관적으로 한 고도의 역사 변천을 기록하는 것이다.","인터넷에서 후통을 여행하는 것은, 비극이라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아예없는 것 보다 훨씬 낫다."

 

 

>>> 나의 짧은 단상 ... 북경에 살다보면 그 변화의 속도에 느껴지는 어지러움은 어쩔 수 없다. 한국인 거주지역에서 온실처럼 살고 있는 이들은 모르겠지만, 중국인들 속에 파묻혀, 그들의 자리에서 살다보면 느낄 수 있다. 그 변화의 모습은 우리의 7,80년에 다르지 않다. 고작 우리의 20년 전 얘기와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북경은 천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중국의 수도 역할을 해온 고도이다. 게다가 현재 중국의 수도이다. 이것은 서안과 전혀 다른 얘기다. 서안은 밑을 파면 문화재가 쏟아져 나와 개발을 할 수 없다는 우스갯 소리가 있다. 그렇다면 북경은 어떤가. 북경 역시 서안과 마찬가지다. 북경은 밑을 파건 땅 위의 것을 부스건, 온 곳에 역사 유산이 산재해 있다. 북경의 거리를 걸으며 지저분하다고 느껴지는 모습들은 천년 고도의 유산이다. 후통 거리를 거닐며 왜 이렇게 살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것 역시 그들의 문화 유산이다. 하지만 문화 유산도 개발의 논리 앞에서는 힘이 없다. 버스를 타고 북경을 돌아다녀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북경의 교통 체증은 북경의 교통체계에도 문제가 있지만, 북경의 열악한 도로 사정에도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천안문에 가까워 질 수록 협소한 도로들은 더욱 많아진다. 하지만 도로를 넓히기 위해서는 허름한 후통과 사합원을 부셔야 한다. 아직도 살아 숨쉬는 문화 유산을 파괴하고 넓혀야 한다. 사람들 눈에 지저분하고 걸리적 거려 보이는 그것들을 파괴해야 한다. 중국, 아니 북경시정부는 지금 그것이 더욱 절실하다. 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았다. 더욱 빨리 부셔 버리고 새로 지워야 한다. 세계인의 앞에 그들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도 말이다. 

 

이 기사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절실히 와 닿는다.

 

"인터넷에서 후통을 여행하는 것은, 비극이라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아예없는 것 보다 훨씬 낫다." 


 

 

 

 

 

 

 

  

   

网友自绘的北京胡同地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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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kin
beijing in china2009. 2. 12. 11:19
[02호] 라오 베이징 계열 기념 봉투 no.3 吃瞪眼食 2006.04.27 00:23
http://paper.cyworld.com/beijing2008/1318104
 

어릴 적 우표 취미라는 거 누구나 한번 가져봤을 것이다. 요즘이야 인터넷이 발달하여, 이국의 풍경을 쉽게 접할 수 있었지만, 20년 전만 어디 그랬던가. 우표 속에 담긴 이국적 풍경이나, 기념물들은 어린 아이들의 눈을 끌기 충분한 것이다. 중국에 와서 느낀 것은 다른 건 몰라도 우표하나 잘 만든다는 것이다. 우표 뿐인가, 편지봉투에 편지 보낼때 찍히는 스탬프 역시 가지 각색이다. 각종 문화 유적부터 시작하여, 기념일, 인물 등등 중국의 다양한 문화가 우표, 편지봉투, 스탬프 등에 담긴다. 그래서 북경에 와서 생긴 취미는 가끔 기념 편지 봉투를 사는 것이다. 박물관에 가면, 그곳 박물관과 관련된 우표나 편지봉투를 파는데, 그것들도 꼭 챙긴다.

 

빠듯한 주머니 사정에 자주 사지 않지만, 우체국 앞을 지나갈 때면 꼭 들려 확인하고 산다. 한달 전 쯤 내 눈을 사로 잡은 기념봉투가 있는데, 바로 라오 베이징 기념 봉투이다. 내가 이 기념 봉투를 처음 발견했을 때는 3,4,5호가 나온 터라, 이미 1,2호는 없었다. 여러 군데를 찾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으니, 어쩔 수없지. 이 기념 봉투는 지난 1월 초 부터 판매를 시작하여 지금 12호까지 나왔다. 앞으로 얼마나 나올지 모르지만 수십여 호에 이를 것이라 한다. 매 호마다 라오베이징의 생활상을 담은 그림과 그 그림을 설명 글이 있다. 안타깝게 구하지 못한 1,2호는 탕후루(과일을 꼬치에 끼어 설탕 녹인 물을 묻혀 파는 겨울 먹거리)와 고구마 구워 파는 내용이라 한다. 인터넷으로 1,2호의 내용을 알아 보기 전에 북경인 친구에게 물었더니, 그 애는 정확하게 답했다. 이유인 즉슨, 이 둘은 아직도 북경 사람들이 즐겨 먹는 간식거리 때문이란다. 이 기념 봉투 시리즈에 담긴 내용 중 어떤 것들은 이미 사라졌고, 어떤 것들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기에 그 봉투 하나하나 보는 것은 북경이라는 도시를 이해하는데 값진 경험을 줄 지도 모른다.

 

이 봉투의 디자인은 侯長春의의 그림과 글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 올리는 것은 라오 베이징 계열의 3호 기념 봉투, "吃瞪眼食".앞으로 내용을 천천히 정리하여 올리도록 하겠다.

 

 

 

 

 

 

 

 

吃瞪眼食

 

老北京賣瞪眼兒食的自馬肉坊躉來煮熟的大牲口肉,改刀成小塊兒,放置在大鍋裏,再加上作料。食客用筷子從鍋裏自取,每夾一塊肉,賣肉的人在一旁以銅錢籌,計其食數,即使數人同時下箸,賣肉的人也能一一記碼,一點兒也不錯,故稱為瞪眼兒食。上世紀四十年代末這個買賣就沒有了。

 

라오베이징의  瞪眼食을 파는 사람들은 도살장으로 부터 생고기를 도매로 사와 삶은 후, 칼로 작게 썰어, 큰 솥에 넣고, 다른 양념들을 더 한다. 손님들은 젓가락을 이용하여 솥 안에 고기를 스스로 건져 먹고,  그들이 매번 집는 것은 한 조각의 고기이다. 고기를 파는 사람은 그 옆에서 동전으로 그들이 먹은 숫자를 센다. 손님들이 동시에 젓가락질을 하더라도, 고기를 파는 사람은 하나 하나 그 숫자를 모두 기억하고, 틀림이 없다. 이를 과거에瞪眼儿食라 불렀다. 지난 세기 40년대 말 이래, 이것을 먹고 파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싸이월드 페이퍼 서비스가 중단된다고 한다. 글을 옮겨오는 중...
Posted by pekin